1 2 . . . 50 . . . 100
근래 다룬 경제에 대해 삶과 관련하여 좀 더 다루어 봅니다.
일부 자료의 도출에 일부 부정확 가능성이 있을 수 있음에도, 숫자의 차이를 넘어 맥락과 추세 관점으로 알맞게 가늠해 보길 바랍니다.
data based on FRB, St Louis
미국의 자산 관련 자료를 보는데 부의 편중이 좀 과한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른 나라도 별 차이가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전체를 100으로 볼 때, 상위 1%의 순 자산의 증가는 상승하고 2부터 100까지의 자산은 감소합니다. 물론 상위 2부터 10과 11부터 20과 21부터 30과 31부터 40과 41부터 50의 부가 상대적으로 중간부터 하위 50에 비해 적다고 하는 것은 아닙니다.
data based on FRB, St Louis
금액으로 놓고 보는 순자산 상위 1%와 나머지 99% 대비해 보면 그 차이가 확연합니다. 거의 그들만의 리그로 보이며, 물론 지표상으로이며 세상은 수 많은 사람들이 함께 이루어 나가는 것임을 알기에, 다른 부자들도 이들에게 비하면 미미하게 보입니다.
물론 몇 참작 요소가 없지 않을 것임에도 대체로 그러함을 부인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여러 투자 자산의 향방은 이렇게 저들에게 좌우되는 것임을 가늠해보게 됩니다.
그래 그들은 특권층으로 분리하여 놓자 여하튼 특출하기에 그런 모습이지 않겠어 하고.
그럼 이후의 모습은 어떠한가, 상위 2%부터 마지막인 100% 의 수준은 어떠한가요.
data based on FRB, St Louis
부자 중상층 중간층 중하층 가난이 혼재하는데 차이가 없지 않음에도, 이는 자본주의 사회의 다양성 측면으로는 적절한 모습이라고 여깁니다.
물론 중간 50%부터 마지막 100%의 삶도 상대적으로는 여전히 바닥권에 있음을 알 수 있기에, 이를 통해 본다면 글쎄 미국이 진정 자유주의 선진 국가이며 기회의 나라인가에 좀 의문이 들기도 하는데, 경제적 부의 다양성이 많이 상실한 것 은 아닌가 싶기 때문입니다. 이는 이와 연계되는 삶의 모습과 표현의 다양성 상실 가능성과 무관한가 싶기도 합니다.
쉽게 말해 이거 아니면 저거라고 주장해야 한다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좀 더 요약하면,
Based on FRB, St Louis Fed data
위에 도표를 통해 삶의 경제적 수준 상위 1%, 2 to 50, 51 to 100으로 나누어 각기 인구수와 각 부의 정도를 가늠해 봅니다.
부동산, 동산의 순자산을 전국민 331,803천명으로 나누면 753,000/1인 정도이며, 이 가운데 상위 1%는 $24,125,629/1인, 2 to 50 는 $1,006,254/1인, 51 to 100 는 $39,204/1인 정도로 가늠합니다.
성경에 미루어 부의 정도를 볼 때 상위 1th는 확실히 지옥, 2 to 50는 천국 지옥의 중간, 51 to 100 는 $ 39,204/1인으로 이들은 확실한 천국 보장 가능성의 계층으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물론 단지 경제적 수치의 관점이며, $30,000 정도라고 하여도 지구 반대편 어딘가에는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음과도 같이, 상대적으로 청빈한 부자와 방탕한 가난한자가 혼재할 수 있음에도 유의가 좀 필요하다고 여겨집니다.
나아가 상위 50과 하위 50으로 인구 분포의 양분이 가능하며, 이는 장점도 있겠거니와 단점으론 다양성의 부족으로 양분된 팽팽함의 긴장과 갈등이 폭발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것입니다. 물론 느슨함이 좋은 모습과 팽팽함이 좋은 모습이 있음을 가늠하며, 전문가의 영역으로 보입니다.
무엇이 문제이며, 이런 모습은 과연 지속 가능한가
지속 가능하기에 그럭저럭 사회가 유지되고 있음에도 진정으로 지속 가능한가와 좋은 사회인가에 의문이 들지 않을 수 없는 모습이지 않는가 싶습니다.
물론 형편이 좋지 않은 자와 가난한 자들은 타성에 젖어 그냥 그렇게 살고 있으며 자족하고 자족하라고 권면하며 최면을 걸기도 걸리기도 하며, 시야를 좀 넓혀 지구 공동체를 놓고 보면 미국의 하류도 여전히 상당한 부자라고 여길 수 있음으로 자족과 만족하며 사는 것이 여러모로 유익이다 라는 접근은 어떠한가요. 원론적으론 타당하여도 글쎄요 싶습니다. 이것이 상대적으로 옳으려면 사람들이 불만이 없어야 하는데 실제 비교의 대상 선정에 착오가 있음을 가늠해야 하며 변수와 요소의 선정에 있어서도 유의가 필요하다고 보입니다.
PM 10 on 9AM Mar 22, 2022 www.earth.nullschool.net
인류를 향한 좋은 나침반인 성경을 통해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육체를 멸하는 자를 두려워 말고 영혼을 지옥에 두시는 분을 진정 두려워하라고 하시며 (마10:28), 부하려는 자마다 올무에 걸린다 (딤전 6:9) 등을 포함하여 여러 말씀도 있습니다. 필요 때마다 개인적인 의견 주장을 위해 인용으로 말씀을 왜곡하려는 것이 아닌지 의문이 들 수 있음에도, 이런 수치를 통해서 본다면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습니다.
부자와 같이 가난한 자도 적절한 곳에 거주하며 여행과 여가와 문화, 의료 등의 바램이 있음을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이렇게 힘들게 벌고 소득도 낮은데 무슨 여행이며 여가인가 그래서 제안하는 것이 크레딧 사회인데 낮은 경제 관점과 재능으로 그렇게 빚이 쌓이며, 결국 경제적 위기에 취약한 계층이 이런 사람들이기에 악순환의 반복인 것이지 않는가 싶습니다. 여기에 적절한 분배 내지의 개선이 부족하여 그런 악순환 만을 탓함을 넘어서, 좋은 사회를 위한 실질적인 개선의 노력이 필요함을 가늠하게 됩니다.
전 세계의 분업화로 일자리가 나뉘는 시절과 이에 대항과 팬데믹 같은 우려의 경험으로 선진국 중진국의 자국 생산 주의로 인한 원가부담 증가와 이를 위한 기계와 자동화 로봇의 세대로 인간의 노동은 줄어드는 것으로 이어지는 세대, 물론 긍정도 있을 것입니다만, 그런 연유로 증대되는 부익부 빈익빈에 대해 적절한 분배의 여지를 상실하면 결국 세상은 부요와 풍족에 의함보다 분노의 세대에 의한 인류에의 자살골과 같은 인류의 종말 가능성이 더 신뢰 가능한 미래 예측은 아닐까 싶습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보다 인간 스스로의 자멸 가능성에 더 무게가 실리는 모습은 아닌가 싶습니다.
과연 알맞은 사회인가 이 세대는,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답은 언제나 그렇게 멀리 있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성경을 통해 나누라고 하십니다. (눅 3:11) 너희 풍족한 자들이여 가진 것을 나누라고 하십니다. 성경엔 답이 있습니다. 가진 것의 극히 일부를 나누는 것이 아니라 충분히 나누고 자립할 수 있게 인도할 책임이 있다 라는 것입니다.
물론 그냥 주는 것이 답이 아님은 여러 차례 논했습니다. 교육과 일자리를 통해, 좋은 일자리 창출이 경쟁과 분업화 세대에 과거와 같이 쉽지 않은 세대와 지역에는, 적절한 자발적 세금의 유익과 알맞은 복지 혜택을 통해 가능한 것이지 않는가 싶습니다.
자녀의 성장과 노인과 가계를 위한 위한 신뢰할만한 중장기 좋은 복지 제도 등이 뒷바침 되어야 한다고 보입니다.
유아, 학령기, 노후의 의료와 금전적인 복지 혜택이 어느 정도 보장되었다는 부분은 그나마 선진국의 부정을 넘어서는 긍정이 있기도 합니다만 다른 지역은 어떠한가 의문입니다.
물론 의식 개선도 필요할 것인데, 각자의 재능이 있듯이, 금융 재능도 아무리 전수하려 해도 되지 않음이 있음에 그래서 여러 좋은 복지 혜택 창출로 함께하는 것이 좋은 것이라 여깁니다.
혜택을 얻는 위치의 사람들도 알맞게 바램이 적절합니다. 물론 해외 여행과 여가 등의 바램은 적절한데 또한 분수에 넘는 과도한 것을 바램에는 유의해야 합니다. 예로, 평생 한두 차례 좋은 해외 여행은 모두에게 가능하게 하여도 빈번한 해외 여행 등은 능력되는 사람에 한해서 허용되는 것이 적절하지 않는가 싶습니다. 알맞음이 좋은 이유입니다.
탕감하라는 말씀도 있습니다. 죄를 사해주라고 하심으로 여기는데, 부채도 탕감해 주라는 것으로 여긴다면 어떤 결과에 이를까요. 탕감 받지 못하는 사람에겐 차별이 되니 조정이 필요하다고 보입니다. 탕감의 또 다른 얼굴은 파산입니다. 값을 것이 없기에 파산하고 관리하에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게 탕감해주고 나면 책임은 금융사가 떠안고 결국 그도 파산하는 것으로 2008년 금융위기가 그런 모습이지 않나 싶습니다.
때론 충격이 도리어 건강을 회복하는 구간이 되며 그 시절만큼 건강했던 적이 과연 있던가 싶은 모습 경험도 있을 것입니다.
내가 고난 받는 것이 유익이라 그 가운데 주의 가르침을 배우게 되었다라는 성경의 말씀과도 같이 그런 경험을 보유신 분들이 적지 않기에. 인생은 그러므로 역설이 함께하게 하신 것 같습니다.
삶을 이루고 부를 이루려는 모습은 인간에 주신 자연스런 모습임에도 알맞게 하는 것인가를 분별하는 것도 필요하다고 여깁니다. 물론 그렇게 과도하게 쌓아둔 것이 단지 어느 한 개인의 부요를 위해서만은 아니며, 사회적 부를 이루기 위하여 기본적으로 적립해 두어야 하는 근원 자산이라고 볼 수 있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진정 그 것이 알맞은 수준이며 개인의 삶이 진정 타당한가를 가늠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은가 싶습니다.
진정 기독교를 근간으로 하는 사회인가 여부를 가늠해 보며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됩니다. 아는 것과 실천이 함께하면 좋을 것입니다.
세상의 곤란은 어떻게 오는가 성장하면서 새삼 깨닳게 됩니다
적절한 균형을 잃으면 곤란이 온다는 것을 과연 이세대의 적절한 균형은 무엇인가 의문해 봐야 하지 않는가 싶습니다.
아무리 좋은 기회를 주어도 잡지 못한다고 능력에 한계가 있다는 등의 주장으로 가난한 자를 탓하기만 하는 접근은 과연 합당한지. 그들에게 그런 능력이 부족함을 안다면 기본 생계와 알맞은 삶을 유지해 줄 수 있는 정도의 사회 혜택을 공급해 주어야 합니다. 자금이 없다고 마련하기 어렵다는 불만이 과연 타당한가 싶습니다. 탐욕의 욕심을 줄이는 것은 어떠한지. 때론 사람들의 그 존재 자체로 지구 공동체에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개인이 치부하였는데 사회가 혼돈이 된다면 과연 그 치부한 삶이 어떻게 되겠는가 싶습니다.
예수께서 부자 청년을 향해 네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고 나를 따르라 그리하면 하늘로부터 보화가 이를 것이라고 (마 19:16 )하심의 진정한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그런 요구하심의 근저는 진정한 균형에 관한 것임을 알게 됩니다.
물론 일의 창출에 적합한 사람과 가르치고 전함에 적합한 사람 등이 있음을 알며 이 세대 각자가 그리스도인의 책무를 알맞게 행해야 합니다.
물론 일반적으로 강요된 주장은 그렇게 들리지 않을 것이기에 사회는 그렇게 균형을 잃어가고 있다고 보입니다. 다만 할 수 있을 때 제때 행하지 못하고 시기를 놓침으로 당사자와 서로간의 후회를 넘어 사회의 혼란의 도래에 유의하면 어떤가 싶습니다
전쟁과 재난이라는 불우하고 우울한 환경의 등장의 슬픔에도 그나마 위안이 되는 부분이 있다면 그렇게 흩어진 불우한 사람들을 향해 부자들이 체험하며 나눔의 소중함을 깨닳게 된다면 합당하지 않는가 싶습니다. 그런 곤경의 때에 부자들로부터 빼앗아 이를 곤란한 자들을 위한 사용도 나름 적절해 보임에도 자칫 이런 타성에 드는 부작용의 가능성이 있습니다. 도적과 해적은 그런 아류이지 않은가 싶기에. 그러므로 우리는 자신들도 그와 같은 곤란에 들 수 있음을 놓치지 않아야 하며 평시에 좀 더 잘 행하는 것이 중요함을 압니다.
다툼이 인생사에 때마다 존재하는 요소임에도 근래의 유럽의 우크라이나 러시아의 분쟁의 모습에 가해와 피해, 피해와 가해의 교차 경험이 인생이라는 아이러니를 경험하게 되며, 그런 실체가 결국 수 많은 사람들의 글과 이야기와 방송과 콘텐츠 등이 되어 산업의 근간이 되고 수입과 각종 부의 증대의 기초가 된다는 부정을 넘는 긍정이라는 혼합에 대해, 이 즈음 인류의 원죄와 그 후손으로서 원죄를 지니고 태어나는 삶의 굴레 가운데, 슬픔을 넘어 알맞게 행하면 좋음의 바램이 듭니다.
이와 같은 부정에의 미혹에도 긍정과 좋은 것을 추구하려는 시도를 잃어서는 곤란할 것입니다. 악을 부정할 수 없음에도 선으로 악을 이겨내라고 성경을 통해 전하시기 때문입니다.
전쟁할 때가 있으며 화평할 때가 있다고 하심의 모습이 그렇게 인생은 그런 순환의 모습이 어쩔 수 없음의 필연이라는 것을 가늠하게 됩니다. 슬픈 시절에 주로 기도하라 하시고 즐거울 때 주로 찬송하라고 하심을 알게 됩니다. 그 모두는 필연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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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알맞은 예방으로 부작용을 최소화하면서 조절이 가능한가요.
물론 유명해지고 싶으면 커다란 혼란의 사건이 배경 가운데 등장하며 이를 해결하면서 유명하게될 수 있을 것임에도, 그 이름을 위해서 사회를 혼란으로 방치하는 것은 과연 진정한 것인가 싶습니다. 이런 혼란의 세대에 항시 등장하는 진짜와 짝퉁의 공존 가운데, 의도의 순전함 여부 분별을 요하는 세대인 것 같습니다.
이즈음 좀 곤란함은 전 세계의 주요 방송 등을 보며 슬픈 내용과 웃는 내용에 교차 노출되어 때론 감정 조절이 힘든 세상이라는 것입니다. 알맞은 감흥과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결국 가지고 있는 나침반은 진짜이며 고장이 나지 않았는가의 분별을 요한다고 보입니다. 아니 나침반은 제 것인데 보는 사람이 착각하고 있지는 않는지 의문해봐야 하지 않을까요.
여러분이 지닌 나침반은 어떠한 것 인가요.
창조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에 보내신 후 2022년이 흘러가고 있으며, 주님으로 머리삼으신 교회를 세우신지 2000여년이 흐르는 이 세대, 그 분의 죽으심과 부활과 승천하심을 통해 하나님의 존재를 증거하심으로 교회를 세워나가심의 뜻의 사순절과 부활과 승천하심과 오순절 성령 강림일의 와중에, 좋음과 곤란의 혼재 가운데 진정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복된 인생이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Apr 2022